김중호 만평

아버지의 해방일지.

팔방미인 이래 2023. 5. 1. 05:57

빨치산의 아버지와 딸, 우리들의 해방일지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두 번 읽었다. 한번은 창비 독자 응모 이벤트를 통해서고, 또 한번은 주변에서 벌어졌던 독서모임의 책으로 선정되어서였다. 그게 뭐가 됐든 두 번이나 같은 행위를 한다는 것은 보지 못한 것, 읽지 못했던 것을 눈에 띄게 해주고 못 찾았던 것을 발견하게 해주는 유익함이 있다.
읽으면서 줄곧 떨쳐버리지 못한 숙제가 왜 지금 ‘빨치산’인가, 라는 의문이었다. 이 소재는 이미 80년대를 관통하고 지나간 흘러간 옛 노래가 아니던가, 그때 못 다 부른 노래가 또 남아 있었단 말인가?

  작년에 출간된 책이지만, 2006년 정지아의 방송 인터뷰 내용을 들어보면, 그때 이미 소설에 등장하는 주요 모티프가 되는 에피소드를 소개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에 해당하는 대표적인 이야기가 방물장수 이야기, 민중이 남겨 놓고 간 벼룩 이야기이다. 독서 모임에서는 허구적으로 꾸며낸 이야기일 것으로 추측들을 했지만 그렇지 않으므로 작가 인터뷰를 찾아볼 것을 권해 주었다. 이렇게 이야기는, 사실은 허구로 둔갑을 하고, 오히려 허구가 사실이 되는 넌센스가 발생하기도 한다.

  작가는 90년에 실천문학사를 통해 ‘빨치산의 딸’ 3권을 출간하고 바로 판금 당한 바 있다. 압제의 뒤끝이 눈뜨고 살아있던 시절이었다. 이후 도피생활과 집행유예, 생활이 피폐해질 수밖에 없는 현실이었고 그냥 꺾여버리기에는 여전히 피가 뜨거웠던 시절이었다. 아버지가 물려준 것은, 바르게 살고 양심을 저버리는 삶을 살지 않는 것, 아무리 뒤로 물러서 있어도,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는 ‘강철 같은 무지개'가 피어 떠올라 있는 땅, 아버지의 세계, 전남 구례였을 것이다.
  그래서 작가는 그 자리에 다시 돌아와 있곤 했다. 아버지의 그늘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태생적 빚을 안고, 오랜 시간 자신의 삶을 갈고 닦아, 꺼내 논 선물 같은 이야기, 작가 개인사에서 맛보았을 굴욕과 부정의를 정지아는 이런 방식으로 헤쳐 나올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저절로 발산하는 웃음의 끝에 코가 찡해지다가, 결국엔 가슴 저 밑바닥에서 묵직한 그 어떤 것이 올라와 목이 잠기게 만든다.
  아버지가 지리산으로 들어가는 바람에 집안은 무너졌다. 아홉 살의 작은 아버지가 자랑스럽게 떠벌린 말때문에 할아버지가 총을 맞아 죽고 마을은 불태워졌던 사실, 그 충격과 트라우마는 지금도 그의 전체 인생을 지배하고 있고, 사촌오빠 길수는 연좌제에 걸려 자신의 꿈을 버려야 했다. 아버지를 중심으로 마을은 좌와 우로 갈라졌지만, 정작 그는 위장자수를한 장기수로 삶의 반을 감옥에서 보냈다. 그의 초상에는 마치 그들 모두가 다 엉겨 붙어 대동굿을 하는 형상을 연출한다.

-이야기는 이야기 자체로써의 가치가 있고, 그것을 더 돋보이게 하는 것은 이야기꾼의 말솜씨다.
  출소한 장기수가 노동으로 연명하고 있는 생활에 대해 ‘노동이 무섭고 힘들다’는 실토를 하는 장면, 방물장수가 하룻밤 자고 갈 방이 없다는 아내에게 ‘자네가 목숨 버리고 지켜야 했던 사람이 저런 사람들, 민중이라’고 준엄(?)하게 일갈하는 아버지의 모습, 사실 그런 아버지는 사시였다는 것, 어디를 쳐다보고 말하는지 보는 사람은 알수 없게 만드는 눈동자의 방향을 가졌다는 것, 사실 아버지 어머니는 재혼 부부라는 것 등등이 이 소설의 밑바닥에 깔려 있는 가벼움들이다. 이런 가벼움들이 역사의 무거움을 홀가분하게 털어버린다. 이것은 ‘아버지의 해방일지’가 새로운 세대를 위한 빨치산이야기라고 볼 수 있는 근거로 작용한다.
  무거운 이야기에 유머가 깔리면서, 빨치산이라는 켜켜이 묵은 소재가 살아난다. 조선의용군 마지막 분대장, 김학철 역시 독립운동가의 생활에 웃음과 장난끼가 있는 이유를 설명한 바 있다. 죽음을 목전에 둔 투사들의 긴장 해소 방식임과 동시에 그들도 하루를 사는 보통사람들이라는 취지의 말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팽팽한 잡아당겨지는 고무줄은 쉽게 끊어져 버리는 것이다.
  그렇게 가볍게 툭툭 던져주는 주제, 현시점에서의 통일문제, 외국인 이민자에 대한 시각, 장례의 외형적 모습에 대한 문제, 위장전향을 모습을 포함한 미전향 장기수의 문제 등을 가깝고 가볍게 만들어 독자에게 보여준다.

-보급투쟁에서의 깨달음, 민중들의 마음이 떠난 혁명은 없다는 것을 깨달은 사회주의자 아버지가 믿는 종교는 '민중'이 되면서 아버지의 노선에 변화가 생긴다.
  돋보이는 것은,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문제를 심도있게 생각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아버지가 남기고 간 모든 것을 종합해보면, 하나의 인간군상들이다. 입면에서 만난 순경, 교련선생 박한우, 감방동기였던 조폭두목과 무등산 타잔, 하동댁, 아들로 받아들인 학수 등은 아버지의 동지들이자, 아버지가 평생을 살면서 깨달은 바 있고 그래서 믿음의 대상인 ‘민중’들이다. 그래서 아버지는 사회주의자라기 보다 민중주의자라고 하는 편이 더 맞는 말이 된다. 그래서 남부군 정치지도원 출신인 어머니, 그가 재혼한 아내를 넘어설 수밖에 없고, 정치지도원인 아내가 곡성군당위원장인 남편의 말에 고분고분하지 않을 수 없는 근본 이유가 거기에 있는 것이다.

-‘인간문제’, 인간으로 귀착하는 아버지의 삶, 그 아버지가 자신이 처한 삶의 굴레로부터 헤어나며 딸의 입으로 남겨 놓은 것, 그래서 그것은 ‘해방일지’가 됨과 동시에, 딸 ‘아리’의 해방일지가 되는 셈이다.
  이 문제에서 절정을 이루는 사건은 입면의 순경 일화이다. 보급투쟁에서 깨달은 민중의 중요성과 함께, 아버지는 다락방에 숨은 순경을 살려준다. 목숨을 건진 순경은 약속대로 순경직을 그만두고, 일이 있을 버스도 다니지 않는 길을 두 시간 꼬박 걸어야만 올 수 있는 거리를 걸어 아버지를 찾아온다. 그 은혜를 갚는 순경의 마음, 더 이상 찾아올 필요 없다는 아버지의 마음, 이것은 도원결의에서 의형제를 맺는 삼인의 대화나 문왕과 강태공이 주고 받는 시절에 관한 이야기에 버금가는 군자들의 대화다. 의와 도에 관한 정곡을 뚫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여기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하는가, 하는 문제를 아버지에게서 정지아는 배운 것이다. 그녀의 빚은 바로 이런 데 있다. 아버지가 그녀에게 넘겨준 빚은 고달픔과 굴레, 이런 것들이 젊었을 적 자신을 옭아 맨 전부였다면, 나이든 정지아가 받아들이고 있는 것은 오히려, 아버지로부터 넘겨받은 부채가, 고스란히 자산으로 변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빨치산 아버지가 남기고 간 것, 위장자수로 아버지는 영원한 미전향 장기수였다.
  노란 머리의 베트남 이민 청소년은 아버지와 맞담배를 폈던 것처럼, 나와도 맞담배질을 서슴없이 하며 어렸을 적 하동댁과 관련한 추억을 꺼내 놓는다. 노란머리의 입을 통해 자신은 아버지에게 ‘경찰보다, 군인보다, 미군보다 더 무서운 딸’이 되어 있었다. 현 남한정부의 정체성을 묻는 진술일 수도 있는 이 서술은 문제를 덮고 선 그 자리에 화자만 외롭게 남는 형국이 된다. 이런 정부의 정체성과, 이 말을 전하고 있는 노란머리 베트남 소녀가 던지는 남한 사회의 사회정체성까지 고스란히 ‘나’에게 남겨 놓고 떠나간, 아버지는 이 자리에 없다. 이제 이 모든 것들이 내 몫으로 산재해 있다.
  아버지가 내게 빚을 물려주었던 것처럼, 내게 아버지는 불편한 존재였고 그래서 더 받아들일 수 없는 안쓰러움이 내면에 찌꺼기처럼 남아 있었다. 그것이 슬픔이고, 그 슬픔이 내게 다가온 방식은 진지해서 웃긴, 아버지의 생활적 진심이었다.
  작가는 인터뷰에서 왜 하필 전봇대에 머리를 박는 아버지의 죽음인가에 대해, 전깃줄이 얼키설키 연결된 모습은 사람들 간의 네트워크를 연상시키기 때문에 아버지의 삶이 사람들과 네트워크화 된 그런 모습으로 그릴 ㅅ 있지 않을까 해서 그런 소재를 사용했다고 한다. 그러나, 어떤 독자가 그런 걸 염두에 두며 읽겠는가, 단지 웃기고 재미있는 죽음으로 받아들이며 이 이야기가 코미디적 요소를 가지고 있다는 유머 해학적 상징적 소재로 이해할 때, 작가가 의도한 취지에 더 부합할 듯하다.

  -왜 지금 빨치산인가?
  53년 전쟁이 끝난 지 70년이 되었다. 강산이 두 번 변하고도 시간이 더 지났고, 역시 세대가 두 세대 이상이 흘렀다. 세상이 바뀌어도, 있었던 사실이 없어지지는 않는다. 받아들이는 감수성이 달려졌고, 사실로부터 멀어져 기억은 희미해져 간다. 그렇다고 치매가 올 때까지 손 놓고 입 벌리고 가만히 있을 수 없다. 이것이 이야기꾼의 숙명이다. 변주, 늘 새로운 해석은 존재하고 그럴 때마다 연주는 변주되어 우리의 가슴을 울린다. 역사는 앞으로 나가지만, 인간사의 반복은 형태를 달리하여 꾸준히 기시감을 가지게 하는 현실을 본다. 한 세대가 마감했다. 이제 남아 있던 숙제를 해야 할 때가 진짜로 도래했다. 이 숙제는 누구 한 사람의 몫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과제로 남아있다.

  역사의 시간과 개인의 시간이 분간 없이 혼동의 시대를 살아간 아버지의 시간, 거기서 역사의 시간을 걷어내고 남는 것을 딸이 끄집어 내 펼쳐 보여주는 소설이다. 그래서 독자는 딸과 아버지를 모두 본다. 그래서 내리는 결어로 다음과 같은 말이 적절하다.

  빨치산의 딸, 아리(지아) 역시 아버지의 그늘에서 놓여 해방을 맞아, 아버지의 해방은 곧 딸의 해방과 동격이 된다. 독자로서의 우리는, 그 해방이 코미디같이 무거운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냉정하게 뜨거운 가슴에 있다는 것을 잘 새겼을 테고, 기쁨과 슬픔이 찰나의 시간차를 두고 교차하는 절묘하게 빛나는 생의 접점을 경험하게 된 것으로 이 소설은 충분한 보상을 준다.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두 번 읽었다. 한번은 창비 독자 응모 이벤트를 통해서고, 또 한번은 주변에서 벌어졌던 독서모임의 책으로 선정되어서였다. 그게 뭐가 됐든 두 번이나 같은 행위를 한다는 것은 보지 못한 것, 읽지 못했던 것을 눈에 띄게 해주고 못 찾았던 것을 발견하게 해주는 유익함이 있다.
읽으면서 줄곧 떨쳐버리지 못한 숙제가 왜 지금 ‘빨치산’인가, 라는 의문이었다. 이 소재는 이미 80년대를 관통하고 지나간 흘러간 옛 노래가 아니던가, 그때 못 다 부른 노래가 또 남아 있었단 말인가?

  작년에 출간된 책이지만, 2006년 정지아의 방송 인터뷰 내용을 들어보면, 그때 이미 소설에 등장하는 주요 모티프가 되는 에피소드를 소개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에 해당하는 대표적인 이야기가 방물장수 이야기, 민중이 남겨 놓고 간 벼룩 이야기이다. 독서 모임에서는 허구적으로 꾸며낸 이야기일 것으로 추측들을 했지만 그렇지 않으므로 작가 인터뷰를 찾아볼 것을 권해 주었다. 이렇게 이야기는, 사실은 허구로 둔갑을 하고, 오히려 허구가 사실이 되는 넌센스가 발생하기도 한다.

  작가는 90년에 실천문학사를 통해 ‘빨치산의 딸’ 3권을 출간하고 바로 판금 당한 바 있다. 압제의 뒤끝이 눈뜨고 살아있던 시절이었다. 이후 도피생활과 집행유예, 생활이 피폐해질 수밖에 없는 현실이었고 그냥 꺾여버리기에는 여전히 피가 뜨거웠던 시절이었다. 아버지가 물려준 것은, 바르게 살고 양심을 저버리는 삶을 살지 않는 것, 아무리 뒤로 물러서 있어도,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는 ‘강철 같은 무지개'가 피어 떠올라 있는 땅, 아버지의 세계, 전남 구례였을 것이다.
  그래서 작가는 그 자리에 다시 돌아와 있곤 했다. 아버지의 그늘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태생적 빚을 안고, 오랜 시간 자신의 삶을 갈고 닦아, 꺼내 논 선물 같은 이야기, 작가 개인사에서 맛보았을 굴욕과 부정의를 정지아는 이런 방식으로 헤쳐 나올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저절로 발산하는 웃음의 끝에 코가 찡해지다가, 결국엔 가슴 저 밑바닥에서 묵직한 그 어떤 것이 올라와 목이 잠기게 만든다.
  아버지가 지리산으로 들어가는 바람에 집안은 무너졌다. 아홉 살의 작은 아버지가 자랑스럽게 떠벌린 말때문에 할아버지가 총을 맞아 죽고 마을은 불태워졌던 사실, 그 충격과 트라우마는 지금도 그의 전체 인생을 지배하고 있고, 사촌오빠 길수는 연좌제에 걸려 자신의 꿈을 버려야 했다. 아버지를 중심으로 마을은 좌와 우로 갈라졌지만, 정작 그는 위장자수를 한 장기수로 삶의 반을 감옥에서 보냈다. 그의 초상에는 마치 그들 모두가 다 엉겨 붙어 대동굿을 하는 형상을 연출한다.

-이야기는 이야기 자체로써의 가치가 있고, 그것을 더 돋보이게 하는 것은 이야기꾼의 말솜씨다.
  출소한 장기수가 노동으로 연명하고 있는 생활에 대해 ‘노동이 무섭고 힘들다’는 실토를 하는 장면, 방물장수가 하룻밤 자고 갈 방이 없다는 아내에게 ‘자네가 목숨 버리고 지켜야 했던 사람이 저런 사람들, 민중이라’고 준엄(?)하게 일갈하는 아버지의 모습, 사실 그런 아버지는 사시였다는 것, 어디를 쳐다보고 말하는지 보는 사람은 알 수 없게 만드는 눈동자의 방향을 가졌다는 것, 사실 아버지 어머니는 재혼 부부라는 것 등등이 이 소설의 밑바닥에 깔려 있는 가벼움들이다. 이런 가벼움들이 역사의 무거움을 홀가분하게 털어버린다. 이것은 ‘아버지의 해방일지’가 새로운 세대를 위한 빨치산이야기라고 볼 수 있는 근거로 작용한다.
  무거운 이야기에 유머가 깔리면서, 빨치산이라는 켜켜이 묵은 소재가 살아난다. 조선의용군 마지막 분대장, 김학철 역시 독립운동가의 생활에 웃음과 장난끼가 있는 이유를 설명한 바 있다. 죽음을 목전에 둔 투사들의 긴장 해소 방식임과 동시에 그들도 하루를 사는 보통사람들이라는 취지의 말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팽팽한 잡아당겨지는 고무줄은 쉽게 끊어져 버리는 것이다.
  그렇게 가볍게 툭툭 던져주는 주제, 현시점에서의 통일문제, 외국인 이민자에 대한 시각, 장례의 외형적 모습에 대한 문제, 위장전향을 모습을 포함한 미전향 장기수의 문제 등을 가깝고 가볍게 만들어 독자에게 보여준다.

-보급투쟁에서의 깨달음, 민중들의 마음이 떠난 혁명은 없다는 것을 깨달은 사회주의자 아버지가 믿는 종교는 '민중'이 되면서 아버지의 노선에 변화가 생긴다.
  돋보이는 것은,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문제를 심도있게 생각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아버지가 남기고 간 모든 것을 종합해보면, 하나의 인간군상들이다. 입면에서 만난 순경, 교련선생 박한우, 감방동기였던 조폭두목과 무등산 타잔, 하동댁, 아들로 받아들인 학수 등은 아버지의 동지들이자, 아버지가 평생을 살면서 깨달은 바 있고 그래서 믿음의 대상인 ‘민중’들이다. 그래서 아버지는 사회주의자라기 보다 민중주의자라고 하는 편이 더 맞는 말이 된다. 그래서 남부군 정치지도원 출신인 어머니, 그가 재혼한 아내를 넘어설 수밖에 없고, 정치지도원인 아내가 곡성군당위원장인 남편의 말에 고분고분하지 않을 수 없는 근본 이유가 거기에 있는 것이다.

-‘인간문제’, 인간으로 귀착하는 아버지의 삶, 그 아버지가 자신이 처한 삶의 굴레로부터 헤어나며 딸의 입으로 남겨 놓은 것, 그래서 그것은 ‘해방일지’가 됨과 동시에, 딸 ‘아리’의 해방일지가 되는 셈이다.
  이 문제에서 절정을 이루는 사건은 입면의 순경 일화이다. 보급투쟁에서 깨달은 민중의 중요성과 함께, 아버지는 다락방에 숨은 순경을 살려준다. 목숨을 건진 순경은 약속대로 순경직을 그만두고, 일이 있을 버스도 다니지 않는 길을 두 시간 꼬박 걸어야만 올 수 있는 거리를 걸어 아버지를 찾아온다. 그 은혜를 갚는 순경의 마음, 더 이상 찾아올 필요 없다는 아버지의 마음, 이것은 도원결의에서 의형제를 맺는 삼인의 대화나 문왕과 강태공이 주고받는 시절에 관한 이야기에 버금가는 군자들의 대화다. 의와 도에 관한 정곡을 뚫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여기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하는가, 하는 문제를 아버지에게서 정지아는 배운 것이다. 그녀의 빚은 바로 이런 데 있다. 아버지가 그녀에게 넘겨준 빚은 고달픔과 굴레, 이런 것들이 젊었을 적 자신을 옭아 맨 전부였다면, 나이든 정지아가 받아들이고 있는 것은 오히려, 아버지로부터 넘겨받은 부채가, 고스란히 자산으로 변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빨치산 아버지가 남기고 간 것, 위장자수로 아버지는 영원한 미전향 장기수였다.
  노란 머리의 베트남 이민 청소년은 아버지와 맞담배를 폈던 것처럼, 나와도 맞담배질을 서슴없이 하며 어렸을 적 하동댁과 관련한 추억을 꺼내 놓는다. 노란머리의 입을 통해 자신은 아버지에게 ‘경찰보다, 군인보다, 미군보다 더 무서운 딸’이 되어 있었다. 현 남한정부의 정체성을 묻는 진술일 수도 있는 이 서술은 문제를 덮고 선 그 자리에 화자만 외롭게 남는 형국이 된다. 이런 정부의 정체성과, 이 말을 전하고 있는 노란머리 베트남 소녀가 던지는 남한 사회의 사회정체성까지 고스란히 ‘나’에게 남겨 놓고 떠나간, 아버지는 이 자리에 없다. 이제 이 모든 것들이 내 몫으로 산재해 있다.
  아버지가 내게 빚을 물려주었던 것처럼, 내게 아버지는 불편한 존재였고 그래서 더 받아들일 수 없는 안쓰러움이 내면에 찌꺼기처럼 남아 있었다. 그것이 슬픔이고, 그 슬픔이 내게 다가온 방식은 진지해서 웃긴, 아버지의 생활적 진심이었다.
  작가는 인터뷰에서 왜 하필 전봇대에 머리를 박는 아버지의 죽음인가에 대해, 전깃줄이 얼키설키 연결된 모습은 사람들 간의 네트워크를 연상시키기 때문에 아버지의 삶이 사람들과 네트워크화 된 그런 모습으로 그릴 ㅅ 있지 않을까 해서 그런 소재를 사용했다고 한다. 그러나, 어떤 독자가 그런 걸 염두에 두며 읽겠는가, 단지 웃기고 재미있는 죽음으로 받아들이며 이 이야기가 코미디적 요소를 가지고 있다는 유머 해학적 상징적 소재로 이해할 때, 작가가 의도한 취지에 더 부합할 듯하다.

  -왜 지금 빨치산인가?
  53년 전쟁이 끝난 지 70년이 되었다. 강산이 두 번 변하고도 시간이 더 지났고, 역시 세대가 두 세대 이상이 흘렀다. 세상이 바뀌어도, 있었던 사실이 없어지지는 않는다. 받아들이는 감수성이 달려졌고, 사실로부터 멀어져 기억은 희미해져 간다. 그렇다고 치매가 올 때까지 손 놓고 입 벌리고 가만히 있을 수 없다. 이것이 이야기꾼의 숙명이다. 변주, 늘 새로운 해석은 존재하고 그럴 때마다 연주는 변주되어 우리의 가슴을 울린다. 역사는 앞으로 나가지만, 인간사의 반복은 형태를 달리하여 꾸준히 기시감을 가지게 하는 현실을 본다. 한 세대가 마감했다. 이제 남아 있던 숙제를 해야 할 때가 진짜로 도래했다. 이 숙제는 누구 한 사람의 몫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과제로 남아있다.

  역사의 시간과 개인의 시간이 분간 없이 혼동의 시대를 살아간 아버지의 시간, 거기서 역사의 시간을 걷어내고 남는 것을 딸이 끄집어 내 펼쳐 보여주는 소설이다. 그래서 독자는 딸과 아버지를 모두 본다. 그래서 내리는 결어로 다음과 같은 말이 적절하다.

  빨치산의 딸, 아리(지아) 역시 아버지의 그늘에서 놓여 해방을 맞아, 아버지의 해방은 곧 딸의 해방과 동격이 된다. 독자로서의 우리는, 그 해방이 코미디같이 무거운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냉정하게 뜨거운 가슴에 있다는 것을 잘 새겼을 테고, 기쁨과 슬픔이 찰나의 시간차를 두고 교차하는 절묘하게 빛나는 생의 접점을 경험하게 된 것으로 이 소설은 충분한 보상을 준다.